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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 나기를 이야기하는 동안

  • 저자 : 김영희
  • 출판사 : 달아실출판사
  • 발행일 : 2020년 12월 20일
  • 페이지 : 124면
  • ISBN : 9791188710898
  • 정가 : 8,000 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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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를 사랑하는 방식으로서의 시 쓰기
- 김영희 시집 『여름 나기를 이야기하는 동안』

해설을 쓴 박성현 시인은 “사유는 존재를 말하고 시인은 성스러움을 이름한다”는 하이데거의 말을 빌려와 김영희 시인의 이번 시집을 “성스러운 저녁 빛에 스며드는” 언어라 하였다. 또한 김영희 시인은 “실존하는 삶에서 성스러움을 발견하고 끊임없이 문장으로 일으켜 세운다”라고 말한다.

다소 길지만 박성현의 해설 일부를 옮긴다.

「김영희 시인의 문장은 ‘살아감’이라는 생활-세계에 깊이 뿌리 박혀 있다. 시인에게는 일상이 살아감의 환희와 기쁨이고 또한 성스러움의 장소다. 그의 문장들은 지금-이곳의 삶을 조금도 벗어나지 않으며, 벗어날 생각이 아예 없다. 그 어떤 고귀한 정신도 시인에게는 ‘너머’라는 초월이 아닌 지금-이곳을 향할 뿐이며, 그것은 “어디에 닿겠다는 질긴 생각을 지우면 / 거저 얻어지는 자유와 선택 / 발걸음 닿는 곳이 경이롭다”(「방향의 설계도」)는 문장에서 암시되듯, 생(生)의 최대치를 이끌어내는 진면목이다. “울음을 울어본 사람만이 아는 / 첫날을 물들이는 첫 울음”(「웃는 울음」)도 시인을 비껴가지 않는다. 과연 살면서, 매순간 그 ‘살아 있음’의 경이(驚異)를 느끼는 사람은 얼마나 될까. 우리는 그와 같은 사람을 ‘예외적 개인’이라 일컬을 정도니 생각만큼 그리 많지는 않다. 다만, 우리들은 지독한 근시여서 가까이 머무는 햇볕의 맑은 떨림도 보지 못하고, 마음 또한 흐릿하여 먼 숲을 흐르는 바람 소리를 듣지 못한다는 것만 인정하자.

절기는 더위를 땅 밑으로 끌어내렸다

중력의 자장 속으로 들어가는
치솟았던 감정들과
어느덧 지쳐버린 유한한 모양의 요소들
한때는 무한함을 믿기도 했었던
가령, 사랑이나 희망 따위

여름을 벗어놓은 시간은
고적한 것들을
가을의 문턱으로 부른다

거리로 몰려나온 사람들이 많아
오히려 쓸쓸해지는 처서를 건너는 저녁
변신과 함께 사라져갈 풍경과,

낯선 노래를 주머니 속에 구겨 넣으며
미리 와 있었던 추억처럼 나는 나를 기다린다
─ 「가을의 문턱」 전문

계절이 물러나고 있다. 입추가 지나면서 서늘해지더니 결국 여름을 밀어내는 것이다. 폭염으로 정점을 찍었던 오후의 태양도, 서서히 찬 기운이 깃들기 시작한다. 그 누구도 지시하지 않았지만, 가을의 도래는 필연이다. 까마득한 옛날부터 그래왔고 앞으로도 그렇게 될, 계절의 순환을 지켜보며 시인은 잠시 ‘자기’를 멈춘다. 존재-함의 실존들은 이미 유한하다. 우주를 이루는 그 어떤 것도, 이를테면 ‘시간’이나 ‘공간’ 혹은 ‘순환’이라는 단어 자체도 유한하다. 사물에 앞서 존재하는 형이상학은 없다. 모든 규범과 법칙은 사물의 존재로부터 귀납될 뿐이다. “한때는 무한함을 믿기도 했”던 ‘사랑’이나 ‘희망’ 따위의 감정들도 잠시 멈춘다. 그렇게, 여름이 흐른다. 흘러가며 가을 속으로 사라진다.
시인은 이 순환의 성스러움을 “여름을 벗어놓은 시간”으로 명명한다. 고적한 것들은 모조리 가을의 문턱으로 몰려오고, 서둘러 쌓이고, 천천히 사라진다. 처서를 건너는 저녁이다. 퇴근길에 사람들이 거리로 쏟아져 나온다. 사람들은 혼자 나와 시청과 정동을 돌아 시립미술관까지 걷는다. 국에 밥을 말아 먹으면서 혼자 저녁 뉴스를 시청한다. 명동의 골목을 따로 흩날리는 은행잎처럼 흐른다. 이상의 집이 있는 서촌에서 효자동까지 다른 사람들과 일정한 거리를 유지한 채 걷는다. 제각각, 멈추면서, 혹은 멈춰 선 채로 아주 멀리 바라보면서. “변신과 함께 사라져갈 풍경”에 스며든다. 적어도 그 성스러운 저녁 빛에 스며드는 순간만큼은 스스로를 돌아보는 것이다. 나는 내가 나타나는 방식이 아닌가.」

박성현 시인이 말하고 싶은 것은 “김영희의 이번 시집은 세상 만물에 깃든 성스러움을 밝혀주고 있으며 성소(聖所)로서의 존재를 드러내 보여주고 있다” 정도로 요약할 수 있겠다.

굳이 부연하자면, 김영희 시인은 시인의 말에서 “존재에 가까워지고 싶은 마음이 자꾸 무언가를 쓰게 만든다. 소용의 가치는 맨 나중 이야기다”라고 얘기한다. 그리고 시집 맨 처음에 배치한 시 「여름」에서는 “햇살 뭉치를 받아든 사람들과 / 슬기로운 여름 나기를 이야기하는 동안” “내 몸은 개펄처럼 / 눅진눅진 포개지며 때론 허물어지며 / 그저 시 한 줄기 바람처럼 일기만을 기다렸다”고 얘기한다. 그리고 시집의 마지막에 배치한 시 「풍선넝쿨」에서는 “나는 어디로 가고 있나 / 끊임없이 표현해야 살아 있는 생이라는 생각에 / 줄기가 흔들릴 때마다” “출렁임이 부풀어 오를 때마다 / 나약한 존재감을 들키고 마는 나의 넝쿨손 / 안으로 심은 씨앗 하나에 작게 새기는 글은 / 그래도 사랑이라는 심장 하나”라고 얘기한다.

그러니까 김영희 시인에게 있어 시 쓰기는 소위 ‘소용과 효용가치’와는 별개의 일이며, 오로지 오롯이 살아 있는 것들의 의미와 존재 가치를 밝히는 데 최선을 다할 뿐이다. 김영희 시인의 이번 시집은 “세상을 사랑하는 방식으로서의 시 쓰기”가 무엇인지, 어떠해야 하는지를 잘 보여주고 있다.